거북이 달린다 - 느긋한, 부드러운, 그러나 확실한. 본 것 - 영화


솔직히 내가 거북이 달린다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은, 내가 예산 토박이인 탓이 크다. 20년 넘게 살아와서 이제는 눈감고도 찾아다닐 수 있는 곳들이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은 꽤나 신선했다. 이 장소가 이렇게 비춰지는구나, 이 장소가 저랬었나? 하게 만드는 느낌. 편집, 혹은 카메라의 시각에 따라 세상이 그렇게나 달라보일 수 있다는 것을 느낀 것만으로도 거북이 달린다에 대해 굉장히 점수를 후하게 주고 싶다. 군청이 경찰서로 변신했고 경찰차들이 거리를 쌩쌩 달리지만 사실 그것도 다 군청 앞이다.[....] 더욱이 내가 사는 집-정확히 말하자면 부모님의 식당-이 나왔다는 것은, 남들이 웃지 않는 장면에서 혼자 낄낄대고 웃을 수 있는 좋은 '꺼리'였다고 할까.

하지만, 이 편협한 시각을 최대한 배제하고 바라봐도 이 영화는 참 괜찮다. 다들 말하듯, 김윤석씨는 추격자에서 너무 연기를 잘 한 탓에 그대로 이미지가 굳어져 버렸다. 하지만 실제로 본 바에 의하면 역시 '거북이'쪽이 김윤석씨의 실제 모습과 비슷하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굳이 촬영할 때가 아니라 사적으로 밥 먹으러 식당에 올 때도 츄리닝에 쓰레빠 신고 터벅터벅 왔다고 할 정도니까.

쓸데없는 이야기로 빠졌지만, '거북이'의 재미는 이 소박함에서 시작한다. 추격자와는 다르다, 추격자와는. 애초에 비교 대상이 다르다고 할까. 장르 자체가 다르다. 따라서 거북이 달린다에서 느껴야 할 재미는 추격자에서 느껴야 할 재미와 다르다. 추격자에서 느끼는 재미는 '긴장'이다. 살인자와 쫓는 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 이해할 수 없는 심리의 범죄자를 보며, 그리고그것을 그야말로 죽을 정도로 처절하게 추격하는 자를 보며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게 되고 그것이 '긴장'이 된다. 스릴러라고 하는 장르를 기초하는 감각. 추격자는 그 감각을 잘 이끌어냈다.

거북이 달린다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추격한다는 상황 자체는 같으나 그 배경이 다르다. 그리고 표현하는 방법 역시 다르다. 회색 상자로 점철된 도심은 음침하고, 제한적이다. 밀실은 아니지만 그 존재감은 밀실과 같다.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고 나의 외침이 닿지 않는 그런 공간. 추격자는 그런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거북이 달린다는 다르다. 부르면 누가 있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부를 수 있다. 이쪽은 넓다. 푸른 하늘 뜨거운 햇빛 아래 펼쳐진 논두렁이 보이는, 그런 공간. 따라서 거북이 달린다는 스릴러가 아니다. 밝은 하늘이 펼쳐져 있는데 공포심이 들 리 없다. 부르면 누군가 달려오는데 공포심이 들 리 없다.

전개 방법의 차이에 따른 극중 분위기 역시 상이하다. 추격자에서는, '자신이 죽을 위험성'을 내포한 채 '수수께끼의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괴물'을 상대하는 과정이 매우 처절하게 그려진다. '결투'가 아니라 '살육', '살해'로 표현되는 무자비한 배틀로얄. 하지만 거북이 달린다에서는 어떠한다. 이건 마치 마왕에게 소중한 것(자존심이든 돈이든)을 털린 주인공이 파티를 모아보지만 깨지고, 결국 자기 단련을 하다 마왕을 함정에 빠트려 최후 결전을 펼친다는 구도는 영웅물과 비슷하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이 익숙한 상황에 대해 '여유를 가지게'된다. 

이 영화가 가지는 장점은 단순히 그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만약 배경이 달랐더라면 어땠을지 상상해 보라. 배경이 추격자와 같은 도심이었다면 이 작품은 죽도 밥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충청남도 예산이라 지정된 배경은 등장인물들을 한없이 느긋하게 만든다. 그 느긋함은 각박하게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심지어 배경이 된 예산의 현실에서도) 느끼기 힘든 것이며, 동경의 대상이며, 추억의 대상이다. 혹은 이상향일 수도 있다. 하여간에 이 기묘한 느긋함은 외국인이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지만 반대로 말해서 한국인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리움을 살살 건드린다. 너무나 익숙한 그 흐름에 떠밀려 웃다 보면 영화는 벌써 끝나 있다. 어? 이게 뭐야? 하고 어리둥절해한다. 이것이 '거북이 달린다'가 가지고 있는 진짜 힘이다.

빠르게, 자극적으로. 현대인들의 마음을 휘어잡으려면 빨라야 한다. 자극적이어야 한다. 즉각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꼭 그래야만 할까? 거북이 달린다는 그 의문을 던저놓고 직접 대답하고 있다. 분명히 거북이 달린다에서 자극적인 부분을 아예 없앤다거나 하는 시도는 하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흐름과 캐릭터간의 감정과 대사, 개그는 느릿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그 여유로움은 이 작품의 장르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액션 같기도 하고 드라마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히어로물인데 어떻게 보면 스릴러고. 하지만 이 '뭉뚱그림'역시 현대사회에서 '세분화하여 공략한다'라는 '필승법'에 대해 정면 반박하는 예라고 할수 있지 않을까.

분명히 이 작품에는 장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느긋함'을 표현하기 위해 희생한 '세밀함'은, '세밀함'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좋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웨이터가 옆에 붙어서 일일히 서빙해주고 먹는 방법 가르쳐주는 레스토랑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이 펑퍼짐한 아줌마가 냅다 밥이랑 반찬 던져놓고 주방에 들어가 버리는 시골 식당에 쉽게 익숙해지지 못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느 쪽이 '나은가'가 아니라 어느 쪽이 '취향인가'에 대한 차이이며,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그 '세밀함'과 '냉철함'에 정면으로 반박하는(이라기보단 앞에서 뒹굴거리는) '여유'에 있지 않나 싶다.




뱀발.

1. 식당에서 촬영할 때는 사진 못찍게 해서 밖에 있던 촬영차만 찍어둔 게 있었는데 막상 찾아보니 없군요.
2. 우리 식당은 얼떨결에 삼겹살집 겸 중국집이 되어버렸습니다.
3. 소싸움을 소재로 쓰긴 했지만 사실 예산은 소싸움보단 한우 고기 자체가 명품입지요.
4. 아버지께서 김윤석씨한테 사인을 받아놓은 추격자 dvd가 행방불명. 어..어디로 갔지?!

5. 1일 3포스팅. 이....인간 승리!

트랙백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TrackbackURL : http://altear.egloos.com/tb/4418336 [도움말]
  • review 「거북이 달린다」 - 권위 잃은 가장, 권위 잃은 공권력 2009/06/25 18:38 #

    *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주 한 주 마다 기분이 안 좋은 소식만 들려옵니다. 뉴스를 보니 이번에 서울시에서 시청 광장과 앞으로 문을 열 예정인 광화문 광장의 ‘폭력’ 행사를 제한하다는 군요. ‘폭력’의 징후가 느껴지거나 시위로 변한 징조가 보이면 허가를 내리지 않겠다는데 서울시가 신도 아닌데 어떻게 그것을 미리 판별을 하는 것인지가 의심스러운 가운데, 학생들은 학교에서 신문을 보면서 공권력을 욕하고 있습니다. 공권력이 점점 시민들의 지...... more

  • 범인을 잡아 나를 되찾는 그날을 위해, 거북이 달린다(2009) 2009/06/25 22:24 #

    거북이 달린다 (영화 상세정보는 하단부에 있습니다. 리뷰에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거북이 달린다. 추격자로 작년 영화제를 휩쓸었던 김윤석이 주연을 맡아 열연한 영화. 더군다나 다시 한번 형사로 나옵니다. 배우 김윤석을 믿고 보게 된 영화입니다..ㅎㅎ 평화롭고 한적한 충청도의 한 시골마을에 근무하는, 직업이 형사인지도 좀 의심스러운 한량 형사 조필성. 그는 범인 잡는 것보다 소싸움 대회 같은 지역 행사 준비에 더 익숙합니다. 어느 날 딸이 있는 ...... more

덧글

덧글 입력 영역